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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유학일기/유학 일기

슬기로운 장거리 비행일지

by 매실이 maesiri 2022. 1. 6.

장거리 비행에 제법 익숙해진 것 같다.

올해 비행기를 여덟번이나 탔고, 그 중 네번은 13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이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뿌듯할만한 건 아닐수도 있는데.. ^^ 어쨌든 내가 뿌듯하니까 오늘은 장거리 비행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1. 

올해 초, 처음 미국행 비행기를 탔을 땐 시간이 이렇게 안 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지루했다.

처음 애인과 가족들과 멀리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잠시 저릿했지만, 사무치는 감정마저도 장거리 비행 앞에서는 흐릿해지더라. 

게다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서 혼자 살아내야한다는 생각에 '혹시 몰라 이것도, 혹시 몰라 저것도' 하며 짐을 바리바리, 이고 지고.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탄 비행기라 찝찝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도 백신이 나오기 전이라 원래는 세명이서 꾸깃꾸깃 앉았을 이코노미 석을 혼자서 차지할 수 있었다. 옆 줄의 유학생 언니(?)로 보이는 사람은 장거리 비행이 익숙한지 이륙하자마자 가운데 손잡이 두개를 접어 올리고, 제공된 3개의 이불을 착착 펴서 누인 몸에 덮더니 밥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10시간을 내리 죽은듯이 잤다. 나도 따라서 손잡이들을 올리고 몸을 뉘긴 했지만, 3인의 엉덩이에 맞춰 만든 울퉁불퉁하고 턱없이 좁은 이코노미석에서 편하게 잠든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해외여행 다닐 때 본 건 있어서 밥먹을 때마다 열심히 와인을 시켜 마셔댔는데도 잠이 도통 오지 않았다. 아마도 옆 줄의 언니는 밤을 새고 온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영화만 3편을 봤다. 푹 주무시라고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 불이 꺼져있었는데 끝내 눈을 감지 못한 나는 덕분에 눈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내린 뒤 미국은 이른 아침이었는데, 그제서야 비행기에서 더 자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옆 줄의 언니는 시차적응까지 계산할 정도로 장거리 비행 전문가임이 분명했다.

 

2. 

두번째,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때는 마음이 무척 가벼웠다. 고독했던 첫학기를 마친 뒤라 한국에 가면 일단 3개월은 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2차 백신까지 맞고 와서 밥도 편하게 먹었다. (코로롱바이럿스의 미친변이가 일어나기 전이었음) 코로나는 이제 진짜 나랑 안녕~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할 시절.

 

그치만 지루한 장거리 비행을 나름 슬기롭게 보낼 수 있게 도와준 1등공신은 바로 친오빠의 책 원고였다. 나름 투자계 인플루언서인 오빠는 올봄 책 원고를 완성해서 가족들에게 먼저 공유했는데, 덕분에 인터넷 연결이 필요없는 100페이지짜리 워드 파일이야말로 비행기에서 시간을 보내는데는 최고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오빠가 글을 잘쓴다는 건 알았지만 정말 술술 잘 읽힌다, 신기해하며 원고를 쓱쓱 읽어갔다. 나름대로 영양가 없는 코멘트도 가끔 달아주면서. 책 원고를 보는 또 하나의 장점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유능하고 개바쁜 커리어우먼이다. 나는 비행기에서도 일을 한다.'는 분위기를 풍길 수 있다는 점이다.

 

원고를 다 본 뒤에도 아이패드에 다운로드 받아온 책을 읽었다. 플라스틱 컵에 담긴 대한항공 와인 한잔과 독서라니. 약간의 갬성도 느껴주었다. 책도 읽고 나른해지니 쉽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한칸씩 띄우고 앉아서 눕지는 못했지만 앉아서 자는 자세에 요령이 생겨 조금씩 잠을 청했다. 나름대로 성공적인 장거리 비행이었다. (고백하자면 원래는 넷플릭스에서 '스위트홈'을 받아오려고 했는데 다운로드 버튼이 1화씩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가서 1화밖에 못봤다..) 

 

3.

솔직히 세번째, 미국으로 다시 나가는 비행기를 타던 날은 거의 기억이 없다. 그저 깨고 싶지 않은 한여름 밤의 꿈에서 떠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만 기억이 난다. 그러니 썩 달갑지 않았던 그 느낌만 남겨두고 네번째로 넘어가겠다. (그짓말이 아니고 렬루 기억이 안남..)

 

4.

네번째, 한국으로 돌아온 며칠 전. 나는 어느덧 내가 첫번째 비행 때 옆자리에 앉은 유학생 언니의 포스를 풍기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다. 면세점은 아웃오브안중에 기내에 드는 짐도 간소화, 기내에서 읽을 책은 당연히 미리 다운로드 받아왔을 뿐만 아니라, 이틀 전부터 서서히 늦게 자기 시작해서 비행을 하는 날은 거의 자지 않고 갔다. (또 고백하자면 시간을 늦추는데 술약속이 엄청 용이했다. 세시반까지 일하는 것은 어렵지만 세시반까지 술 마시는 건 쉬우니까!)  이틀연속 술약속에 잠도 부족한 덕분에 공항까지 가는 버스에서부터 부지런히도 잤다. 마스크가 이럴 땐 참 도움이 된다.

 

게다가 생각보다 기내에서도 잠을 오래 잘 수 있었다. 처음으로 통잠자는 아기처럼 내 자신이 신기했다. 그치만 첫 비행 때 본 장거리 만렙 언니처럼 10시간을 내리 잘 수는 없었고 아마도 5시간은 풀로 잔 것 같았다. 그게 어디냐며 혼자 기뻐하면서 아이패드에 다운로드 받은 책을 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잘 읽히지도 않던 책이 주변 환경이 통제되니까 어찌나 술술 읽히던지.. 기내에서만 2권을 완독했다. 비행 중에 책이 좋은 건 술술 읽히든 말든 일단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고 조금이라도 피로가 남았다면 눈을 감게해준다는 거다. 5시간 자고서도 부족했던 잠을 틈틈이 채울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영화를 잘 안보게 됐다. 결국 마지막에는 너무 심심해서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를 보긴 했지만- 아 그리고 프렌지 시리즈가 있어서 밥 먹으면서 좀 보긴 했지만 :D

 

5.

다음주에 또 장거리 비행을 한다.

이번엔 6년 전 유럽여행 갔을 때 이후 처음으로 직항이 아니라 경유로 16시간을 간다. 

기대가 된다면 거짓말이고.. 약간 걱정은 되지만. 

또 개바쁜 커리어우먼인 척할 문서와 꾸벅꾸벅 졸면서도 완독하고 싶은 전자책, 그리고 넷플릭스에서 다운받아갈 시리즈 물 몇 개라면 너무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을 거다..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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