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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유학일기/유학 일기

나의 급성 고독과 회복 매커니즘

by 매실이 maesiri 2023. 6. 15.

어느날은 숭례문 앞에서 친구와 사주를 봤는데 내가 평생 고독하고, 나중에는 고독을 즐길 사주라고 했다. 주변에 가족, 친구들이 늘 있지만 혼자서 괜히 고독을 느낀다고 한다. 사주가 다 맞겠냐마는 그 말은 특히나 공감이 돼서 어디 적어두지 않았어도 기억이 난다. 실제로 나는 객관적으로 꽤 잘 살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보다 훨씬 고독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내가 특히 고독을 느끼는 순간들은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시작되는데, 이때 나의 감성수준은 공익광고를 보고 오열할 수 있을 정도고 날씨가 좋으면 엄청나게 행복해하다가도 해만 지면 우울해하는 감정기복의 극치다. 이 고독은 미국에 돌아와서 첫 1-2주를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서 더 오래 지속되기도 하고 1주만에 끝나기도 하는데 나는 이 기간에 '급성 고독'에 걸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행히 코시국 때부터 유학을 나와 진짜 싫은 이별들을 겪으면서 스스로 고독을 어떻게 다스려야할지 약간의 학습이 되었다.  

 

그 중 가장 효과가 빠른 것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일부러 귀국한 주부터 오피스 근처 요가학원에 등록했다. 예전같으면 혼자서 절대 안 갈텐데 이제 미국놈 다됐다. 미국 돌아온지 2주도 안돼서 요가를 네번이나 갔는데 그 중에는 꽤 빡센 수업들도 있어서 어느새 붓기와 피하지방이 많이 얇아졌다. 급성고독기간에는 식욕이 없고 안 졸려도 일단 누우면 자게 돼서 초저녁부터 아침까지 굶어 간헐적 단식까지 절로 된다. 최고의 다이어트는 이별 다이어트? 만만치 않은 다이어트는 출국 다이어트다. 이 두가지를 모두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출국 다이어트가 좀 더 효과적인듯. 출국다이어트는 폭식과 과음이 껴들 위험이 적다. ^^ 

아무튼 몸을 강제로 움직여서 일상에 작은 성취 모먼트들을 쑤셔 넣어주면 좀 덜 고독하다. 단점은.. 돈이 좀 든다.

 

그 다음으로는 식물.

나는 반려동물은 실수로 죽일까봐 무서워서 반려식물을 키우는데  이상하게 야자 계열 친구들이 좀 더 도움이 된다. 진짜 왜 그런지 궁금한데 그냥 내 식물 취향일지도.

역사적인 미국 첫 분갈이의 현장

이번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식물들 분갈이도 해주고 오피스에 새로운 식물들도 들였는데, 오른쪽 사진에서 왼쪽은 날렵이, 가운데는 원래 있던 기영이, 그리고 오른쪽은 흰무늬초록이로 이름은 모두 작명실력이 제법인 H가 지어줬다. 식물을 가꾸면서 위로를 받으면, 고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고독이라는 건 어쩌면 애정을 쏟을 곳이 필요한 상태일지도 몰라.

 

 

비슷한 맥락으로, 나는 뭔가를 만들면서 급성고독으로부터 회복한다.

예전에는 요리도 많이 해보고 밥해먹는 브이로그도 만들었는데, 영상편집에 조금 질려서 이번에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작한지는 2주 됐는데 벌써 세번째 그림이니까 요즘 내 메인 취미라고 봐야되겠다. 

위아더월드 아님 르세라핌언포기븐 아님

처음에는 분갈이할 화분이 너무 휑해서 화분에만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가  캔버스로 넘어와서 내가 좋아하는 풍경들을 그리고 있다. 그림을 그리면 시간이 슝가버려서 좋다. 시간에 맞춰 사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내가 사는 것과 별개로 시간이 혼자 흘러가는 느낌. 고독과 아주 반대되는 느낌이다. 요리나 영상과 다르게 만질 수 있는 결과가 남는 것도 좋다.

이렇게 2주를 보내면 그나마 급성고독을 빨리 벗어날 수 있다. 핵심은 갈 곳 잃은 애정전선들이 어딘가에 정착하게 도와주는 작업. 술이나 넷플릭스보다 좀 덜 머리아프게 회복할 수 있게 내가 학습한 방법들이다. 이 방법들은 매번 조금씩 갱신되는데  앞으로 살 날이 많으니 얼마나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보게 될까? 적다보니 고독을 회복하는 방법이 아니라 고독을 즐기는 방법들인 것 같다.

 

숭례문 사주 아저씨가 한 말이 맞았다. 나는 결국 고독을 즐길 사람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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