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는 왜 그렇게 남얘기 하기를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좋은 얘기보다는 나쁜 얘기가 더 재미있었고, 친한 친구한테 내가 들은 남의 나쁜 얘기를 전해줄 때, 혹은 반대로 쉬이 들을 수 없는 남의 비밀을 들을 때에는 특히 더 재미있었다. 낙엽이 구르는 것만 봐도 꺄르륵 웃을 나이의 소녀들을 지루한 학원과 학교라는 굴레에 가둬놓아 그런지도, 아니면 내가 남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남도 내 이야기를 한다는 뜻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때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급식시간에 회전초밥집 인기 없는 계란초밥이 된 것처럼 운동장을 하염없이 돌면서 전해듣는 비밀 이야기는 그야말로 지루한 학교생활의 낙이였다.
돌아보면 무지 부끄럽다. 이제와서 부끄러워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그 시절 남얘기를 하던 기억에 부끄러워 침대에서 마른 세수를 하는 날이 아직 더러 있지만 모두가 그랬으니까, 지금은 나랑 연락하지 않는 동창 친구들이 나를 남얘기 잘하던 애로 기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도 나랑 연락하는 친구들과 만나면 나도 걔네도 이제는 남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 얘는 이렇게 됐다더라, 쟤는 저렇게 산다더라 이야기는 듣고 전하지만 그저 오 그래? 아 그렇구나! 잘됐다! 잘되겠다! 정도의 리액션만 하고 넘어간다. 쓴 커피를 마시면서 한강공원을 걷고 소맥짠을 하면서 안주를 파먹지만, 그 시절 우리처럼 남얘기를 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랑 싸우거나 쌩까거나 하는 드라마틱한 일이 잦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이야기가 있다하더라도 그저 아 그럴수도있겠당 정도의 코멘트만 남기고 말아버린다.
이런 변화를 성숙이라고 감히 칭할 수 있을지는... 역시 모르겠다. 성숙이라기에는 아직 변화의 결과물인 내가 너무 미숙하고, 단순히 나이들어 그런 것이라고 하기엔 설명이 부족한 느낌이다. 어쨌건 그 변화는 우리 소녀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여전히 만나서 몇시간을 떠들 수 있지만 남의 이야기, 특히 남의 나쁜 이야기 없이도 재미있게 대화할 수 있다. 이제는 자기 얘기로도 시간이 부족하게 떠들 수 있고 이야깃거리가 없으면 남얘기 대신에 세상 얘기, 재미있다는 넷플릭스 얘기를 할 수 있다. 인격의 성숙이 아니라 주변 콘텐츠의 성숙 정도로 생각해야겠다. 그리고 그때의 나를, 그때의 우리를 부끄럽다는 이유로 덮어놓지는 말아야겠다. 그냥 애벌레가 변태하는 과정에서 징그러운 허물을 남기는 것과 같은 과정이었다고 받아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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