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등반 D-1.
오지 않을 것 같던 날이 왔다.
좀 친했던 과동기들이 모인 카톡방에서 '한라산 ㄱ?' 할때만 해도 별 생각 없었다.
처음에 말 꺼냈을 땐 조금 진심이었는데, 학기 중에 한라산 계획 세운다고 했을 때는 별로 진심이 아니었던 것도 같다.
역시 사람은 말을 할 때 신중하게 내뱉어야 한다...
톡방을 돌아보니 나혼자산다에서 전현무가 새해 첫날 한라산 간 게 원동력이었구만.
친구들이 회사라는 조직에 들어가더니 별안간 회사일만 아니면 실행력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는 새에 등산 코스 예약을 비롯한 모든 여행 준비가 끝나있었다. 어차피 부모님과 제주도에 한동안 내려가있을 예정이었던 나는 그야말로 몸만 가면 됐다. 일단 졸업준비로 소홀했던 나 대신 착착 진행해준 친구들은 감사.. ><
칼을 뽑은 이상 무만 자르지는 말아야지! 괜히 욕심이 나서 장비를 이것저것 준비했다.
실은 한라산에 간다고 했더니 부모님이 모든 등산용품을 꺼내주셨다.
스틱은 기본이요, 등산용 가방, 앉을 때 필요한 스티로폼 쿠션, 손수건, 팔토시, 등산모자, 등산화, 등산 양말, 등등 행군에 필요한 장비들을 빠짐없이 챙겨갔다. 겨우 2박 3일 친구들과 놀러가는데 캐리온 캐리어 하나랑 큰 에코백 하나가 꽉 찼다.
시간도 떼우고 다리도 좀 풀 겸, 교래자연휴양림에 들렀다. (사실은 들르려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다른 카페를 가려다가 그냥 비야 올테면 와라 우리는 맞을란다 마인드로 우비를 사고 들어갔다 이 사이에 많은 우여곡절 어쩌고저쩌고 있음)
휴양림 앞에서 우연히 우리 부모님을 마주쳤다.
7년동안 친구하면서 한번도 뵌적 없을 우리 부모님을 제주도에서 보다니
'제주가 더 좁긴 좁네' 했을 것이다.
제주의 초여름은 정말 아름답다. 국내에서는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검붉은 토양! 배경색이 예쁘니까 같은 식물이 자라도 더 예뻐보이는 것 같다. 땅에서는 고사리 같은 것들이 땅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위로는 나무들이 비를 막아줬다. 덕분에 우비만 쓰고도 많이 젖지 않을 수 있었다.
가다가 소라빵 과자 닮은 달팽이도 만났다.
나무 뒤에 눈예쁜 저 여자애는 누구징?
어쨌든 한시간 남짓의 휴양림 코스는 다음날 한라산 가기 전 몸풀기로 딱이었다.
교래휴양림 1분 거리에 있는 램앤블랙이라는 양고기 집을 갔다. 내일 거사를 치를 예정이니 의식을 치르지 않을 수 없고 그렇다고 술을 마실 수도 없으니 다같이 논알콜 칭따오를 한병씩 먹었다.
솔직히 그냥 칭따오보다 맛있음 강chu
숙소로 돌아가다가 이마트에 들러 내일 도시락을 싸기 위해 햇반, 유부초밥 셋트, 반찬, 닭강정, 오이, 토마토 같은 것들을 샀다.
쓰러짐 방지를 위해 한입크기로 나온 에너지바랑 이온음료도 잔뜩 준비했다.
지금 사진 보니까 데님여성 갸루 피스중이네
아침에 도시락 싸는 것은 어떨까 잠깐 생각도 했지만
성판악 코스를 가는데 숙소를 애월에 잡았기 때문에 (? 나는 몰라.. 나느 모르는 일이야..)
도시락을 미리 싸놨다고 가정해도 우리는 새벽 3시에 기상해야 했고....
그러면 도시락을 제대로 싸지 못하고 출발하거나, 출발을 늦게 하게 되거나,
모두가 예민해져서 도시락 싸다가 절교하고 출발을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돌아가면서 잘 준비와 도시락 싸기를 분담해서 진행했다.
한시간만에 7인분 도시락 싸기 ssap 가능. 역시 공대 동기들이 합은 잘 맞는다.
감정없이 착착 일을 진행하는 게 아주 마음에 들어.. 웅치키 웅치키
한라산 등반 D-day
한숨도 못잤다.
어쩌면 10초 정도 잤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내 느낌에는 한순간도 잠들지 못한 거 같다.
언제나 그렇듯 내가 잤거나 못 잤거나 시간은 별로 관심이 없다.
못 일어나는 친구들을 깨우고 다같이 스트레칭을 했다.
아래 사진은 2층에서 1층 남성 동기님들을 보고 동작을 따라하는 여성 동기님들
사진으로 보니까 약간 광기가 느껴지네
여전히 9rin언니가 긴팔 긴바지를 입고 어떻게 더위를 견뎠는지 의문이네. 언니도 한숨도 못잤다고 했다.
다행히 전날 내리던 빗바람은 잦아들고 뿌옇게 물안개가 꼈다.
팔토시 재질의 등산복에 물안개가 닿으면 시원해서 오히려 좋았다.
한라산 성판악 코스로 가면 중간에 크게 두개의 휴게소가 있다. 첫번째는 속밭대피소 (입구부터 1시간 20분 거리), 두번째는 진달래휴게소 (속밭에서 1시간 40분 거리).
진달래 휴게소에서 먹는 도시락은 정말 꿀맛!!
평범한 유부초밥에 평범한 반찬에 다 식은 닭강정인데 특별히 맛있었다.
이 뒤로 어떻게 정상까지 갔는지 모르겠다.
진달래 휴게소에서 백록담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정도 걸리는데,
머리 위 높이로 자라는 식물들이 없어서 속절없이 내리쬐는 햇빛을 맞으면서 올라갔다.
금방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름이 내 발 밑으로 깔리고 나니 퍼런 하늘이랑 산이랑 까마귀만 있었다.
드디어 백록담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아무도 안 다치고 올라왔다는 안도감이 확 몰려왔다.
시원한 바람은 고생을 싹 씻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서 백록담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에 서서 잠시동안 백록담을 관찰했다. 사진에는 안 찍혔지만 커다란 까마귀가 정말 많았다. 백록담 자체는 생각보다 작았지만 뒤로 보이는 구름이 깔린 하늘 덕분에 내가 새삼 아주 높이 올라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근데 전날 비가 많이 와서 백록담에 물이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말라있었다. 비는 저 구름 밑으로만 내린거냐..
옆에 친구들이 부모님께 영상통화를 걸길래 나도 통화했다.
정상까지 올라오는 건 북한산이 더 어렵다고 했더니 콧방귀를 뀌셨다. 이때는 그 의미를 몰랐다. ^^
훌륭한 젊은이들이구만.
너무 오래 쉬었다가 내려오면 더 힘들거라고 해서 사진만 찍고 발길을 돌렸다.
내려오는 길--
아무도 내려오는 게 더 힘들다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4시간 30분 정도 걸려서 올라가서 3시간 30분이면 내려올 줄 알았다.
보통 산들은 내려오는 게 더 빠르지 않나..?
한라산은 중간중간 험한 길도 있고 이미 다리가 너무 지쳐서인지
6시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인증서 뽑는데 제정신 아니었음..
집에 가는 길 제정신x
그렇게 등산을 하고서도 한시간 운전해야 했던 모아이에게 무한존경..
전현무 나혼산 보면서 저렇게 체력이 없어서야.. 했는데
그게 나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국민 MC 체력이 나보다 안 좋을리 없다.
집에서 번갈아 씻으면서 친구들이 흑돼지, 순대볶음, 족발볶음 같은 걸 시켰다.
음식도 음식인데
술이 진짜 쫙쫙 들어갔다. 요트부 Jack영이를 다시보게된 날..
근데 너무 피곤해서 어느순간부터 술도 안들어가고 잠만 오기 시작했다.
체력 거지..
곰돌이 티셔츠가 귀여운 역Young 이는 팔에 선크림 바르는 걸 까먹고 백록담에 간 댓가로 팔에 화상을 입었다.
남은 오이랑 물티슈로 처치를 했는데 꽤 오래 갔다고 했다. 지금은 색이 돌아왔으려나..
자외선차단제는 진짜 무조건 필수라는 걸 친구 팔을 빌려 또 한번 배웠다.
나는 발에 물집이 4개가 잡혔는데 하나는 이미 터진 물집이었다.. 호호.. Ouch..
--제대로 걷기 불가--
한라산 등반 D+1
전날 밤을 새고 한라산을 다녀왔고.. 술을 마셨고.. 그랬지..
죽은 듯 잠을 깊게 자고나니 어제 일이 별로 현실성이 없다.
아침에 눈이 떠져서 역Young이랑 Jack영이랑 아침 산책을 했다.
잘 안걸어진다고 진짜로 안걸으면 다리가 천천히 풀릴 것 같아서 다리 풀 겸~ 커피도 살 겸~ 걸었다.
내 다리가 아프건 말건 하늘이랑 바다는 이쁘구나~~
카페에 앉아있는데 맞은 편에 앉은 남자애는 숙취에 쩔어서 헛개수 한병 세워놓고, 수박주스 하나 시켜놓고 백팩을 껴안고 자고 있었다.
대학생 때의 내가 생각나는 군.. ㅜㅜ
++ 한라산 등반 한달 후..
겨울에 다시 한라산을 가자고 하는 씩씩거리는 무지..
한라산은 설경이 그렇게 아름답다는데!!
아직은 궁금함 반, 두려움 반이다.
한라산에 대한 기억이 미화되고 나면 다짐해봐야겠다.
2023.01.10 - [느리게 쓰는 여행일기/국내여행] - 진짜로 간 겨울의 한라산 윗세오름 - 영실코스 with 그때 그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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